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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매국노 '을사오적'을 위한 위험한 변명

by 스튜디오윤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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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자 고종

'이완용은 매국행위로 이름을 더럽힌 인간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멸망의 모든 책임을, 특히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과' 사오적'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지금부터 차근히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완용은 1897 9 러시아 군사교관의 초청을 반대하다가 학부대신에서 평안남도 관찰사로 밀려났습니다. 부친이 사망하자 2년간 상을 치르는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04 11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어 벼슬 생활을 재개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갑오경장으로 겨우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전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황제의 전제권이 강화되어 모든 정사가 황제중심으로 진행되고있었습니다. 밖으로는 러일전쟁이 한창이어서 일본과 러시아가 국운을 대혈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러일전쟁 발발 2 후인 1904 2 23, 일본은 대한제국과 일종의 군사동맹에 해당 하는 '한일의정서' 조인했습니다. 조약 체결로 인해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한국 영토의 어느 곳이나 수용할 있게 되었습니다.

 

제 1차 한일 협약

8 22일에는 '1 한일협약' 체결되었습니다. 협약에 의해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사람은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교원과 외교고문에 임명하여 이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일본 정부와 협의하여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이라는 독립국가는 껍데기만 남고,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1905
3 10 일본이펑텐전투에서신승했고 5 29일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 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해전으로 사실상 러일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일본은 7 27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협약을 맺었고, 8 12 2 영일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대해 미국과 영국의 지지와 동의를 얻었습니다.


정상적인 외교 절차 무시하고 고종에게 조약체결 요구

5 포츠머스강화조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가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대한제국에 파견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라는 훈령을 받고 11 9 서울에 이토는 일본 수상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일본을 대표하는 베테랑 정치가였습니다. 11 10 덕수궁에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토는 고종에게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습니 . 친서에는 "동양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해 한일 나라는 친선 과 협조를 강화해야 하며,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도 한국황실의 존엄은조금도 훼손되지 않을 '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11
15 오후 3 30, 이토는 또다시 고종을 알현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외국과 조약을 제결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외교적 절차가 있습니다. 해당국 공사가 먼저 한국 외교부서와 교섭하고, 외교부는 이것을 협의 한 황제의 재가를 받아 조인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이토는 이런 외교적 프로토콜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직접 조약문을 내놓고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의 고종회유

이날 이토는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대외 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목적은 오직 동양평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에 있을 다른 뜻은 없다. 내정은 자치에 맡길 것이니 황제 폐하께서 계속 한국을 다스리는 것에는 하등 변함이없다"라고회유했습니다. 고종은 "일본에 외교권 이양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교권의 형식만이라도 남겨달라"라고여러 차례 요청했습니다. 이토는 " 조약은 절대 변경할 없다. 동의냐 거절이냐는 황제 폐하의 자유지만, 만약 거절할 경우 한국은 크게 곤란 처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각오해야한다"라고협박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곤스케세공사 간에 교섭이 끝나면 의정부 회의에서 결정하겠다."고 책임을 내각에 떠넘겼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토는 11 16 오후 4, 한국 정부의 자료와 원로 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순타 호텔로 소집하여 "이번 조약안은 절대 내용을 변경할 없다. 다만 자구나 표현 사소한 제는 협의가가능하다"라고유화책을 제시했습니다. 다음날인 11 17 오전 11,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대신 8명이 일본공사관에 모여 조약 교섭을 위한 회의를열었습니다. 하지만어느 누구도 의견을 내놓지 않고 눈치만 보자 하야시 공사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해 대신들과 함께 입궐하여 고종의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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